뷰티이야기

<뷰티이야기> 대한민국_단아하고 수려하다

spielraum barbershop 2021. 12. 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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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움은 청결에서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흰색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하얀 피부는 높은 신분을 상징하였고 그래서 남녀 구분 없이 백색 피부를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피부를 갖기 위해 청결을 중시하였고 옷과 신체를 가꾸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와 빗질을 하며, 외출 후에는 손과 발을 씻는 것이 자신을 가꾸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기본이었다.

삼국시대의 美

우리가 시각화된 자료로써 선조들의 미용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는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고분벽화를 보면 하얀 피부와 가늘고 얇은 일자형의 둥근 눈썹, 작고 긴 눈매와 넓은 이마, 불그스름한 볼, 작고 오뚝한 코와 입술이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고구려 벽화에는 눈 주변으로 지금의 아이섀도와 유사한 붉은 화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화장법은 인접국가에서는 하지 않는 고구려 여인들만의 특별한 화장법이었다. 신라는 남성들도 화장에 공을 들이는데 화랑이 화장에 대한 관심사는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으로 따지면 미소년 군단이라고 해야 할까? 아름다운 옷을 입고 분을 칠했는데 화랑정신에는 아름다운 육체가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 의 반영이었다. 그만큼 신라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까지도 화장을 하고 아름다움을 귀히 여기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의 美

고려시대에 와서 보다 차별화된 화장술이 시작된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기생들이 즐겨했던 분대 화장이라고 불려지는 화장술이 미의 중심에 서는데 지금에 비유하면 짙고 야한 화장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흰 분을 바르고, 눈썹은 매울 가늘고 길게 진하게 칠하며,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 운을 내어 사치스럽게 보이는 화장문화가 성행한다. 하지만 부유층의 경우 수수함을 강조하는 엷은 화장을 선호했다고 한다. 부유층의 부녀자들은 복숭아꽃이나 난초 등을 넣은 물로 목욕을 즐겼다고 하는 걸 보면 색조화장보다는 피부관리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보통의 경우 붉은 입술연지 정도를 즐겨했으며, 의례가 있을 때나 눈썹을 굵게 그렸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가 말하는 연지곤지(볼과 이마에 원형의 붉은 화장)는 혼례 때만 하는 화장법이었다.

조선시대의 美

조선시대에 오면 더욱 세분화된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데 궁궐이나 사대부 연인들은 단아한 기초화장을 하지만, 기생들은 고려의 화장술을 답습하여 더욱 화려한 색조화장을 했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그 이전의 시대들에 비해 진하진 않았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도 절제된 세련미가 넘쳤다. 피부는 하얗고 살결은 부드러우며, 흉터나 잡티가 없도록 관리했고 눈썹과 연지를 칠하되 자신 본래의 얼굴의 특성과 조화로움을 찾도록 가꾸었다. 이는 얼굴이 화장 전, 후가 크게 달라 보이는 것을 야용(冶容)이라 하여 크게 경멸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화로 <조선왕조실록>에 '분칠'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연군산군은 여인을 간택할 때 '어찌 분칠 한 것을 참 자색이라 할 수 있겠느냐? 라며, 간택할 때는 분칠을 못하게 명하여 그 진위를 가리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왕자의 여인의 간택에 관한 내용이긴 하지만 화장을 금지한 것이기도 하므로 화장을 바라보는 시대적 의미로 해석하기에 의미가 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에서도 여인들이 궁에 들어올 때 분만 바르게 하였다. 조선 후기 미의 기준을 여볼 수 있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 골격은 풍만하고, 머리카락은 검고 숱이 많으며, 인중이 긴 여성이 미인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앵두 같은 작은 입술과 초승달 모양의 흐리고 가느다라며 쌍꺼풀 없는 가녀린 눈, 그리고 작은 콧방울은 당시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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